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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항복’ 요구하다가 ‘무조건 항복’한 트럼프의 굴욕

장정수 언론시국회의 집행위원(전 한겨레 기자) | 기사입력 2026/06/22 [13:38]

‘무조건 항복’ 요구하다가 ‘무조건 항복’한 트럼프의 굴욕

장정수 언론시국회의 집행위원(전 한겨레 기자) | 입력 : 2026/06/22 [13:38]

전세계 언론이 일제히 보도한 미국-이란 휴전 양해각서(MOU) 14개 조항의 내용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란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미국 언론들은 이란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정작 자신이 "무조건 항복"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트럼프 지지 성향의 폭스TV조차 "이란에 굴복했다"는 공화당 내 강경파들의 반발을 상세히 보도할 정도다. 민주당 인사들은 이 양해각서가 이란에 바치는 '항복 문서'라고 맹렬하게 성토한다.

 

전쟁 발발 직후 "무조건 항복 이외에 이란과의 협상은 없다"고 큰소리치던 트럼프 대통령은 왜 이처럼 굴욕적인 합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이란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촉발한 국제유가 폭등과 경제 악화로 트럼프 대통령이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봉쇄 직후 국제유가는 급등했고,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5달러에 육박했다. 전쟁 발발 이전 대비 두 배 가까이 치솟은 연료비는, 자동차 없이는 슈퍼마켓조차 갈 수 없는 미국 사회의 일상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이는 물류비 상승으로 이어져 5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경제 전반에 걷잡을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그 결과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40%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은 초비상 상태에 빠졌다. 공화당은 올해 실시된 모든 보궐선거에서 전패했고, 심지어 공화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텍사스주 상원 9선거구 보궐선거에서조차 민주당 후보가 14%포인트 차이로 완승을 거뒀다. 

 

2024년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17%포인트 차이로 대승을 거뒀던 바로 그 지역에서, 불과 1년여 만에 무려 31%포인트가 이탈한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호남에서 국민의힘 후보가 압승한 것과 같은 충격이 공화당을 강타한 셈이다.

 

전쟁 장기화와 지지율 하락이 겹치면서 공화당 중진·현역 의원들의 재선 불출마와 정계 은퇴 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현재까지 연방 하원 공화당 의원 36명, 상원 의원 7명이 불출마를 선언해, 민주당(하원 21명·상원 4명)에 비해 현저히 높은 이탈 규모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난파선 탈출' 분위기가 공화당 전체로 번지는 형국이다. 

 

미국 언론들은 중간선거에서의 민주당 하원 탈환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상원마저 민주당이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한다. 만약 민주당이 상하원을 동시에 장악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트럼프가 이 치욕적인 협상안을 받아들인 데는 군사적 실패라는 냉혹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이란의 봉쇄를 미국의 군사력으로는 끝내 무력화하지 못했다. 과거 이란의 봉쇄 수단은 기뢰가 주력이었고, 미국 해군의 소해 능력으로 충분히 제거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이란이 동원한 첨단 드론과 정밀 미사일은 기존의 해군력 우위 공식을 정면으로 깨뜨렸다. 항공모함 3척을 투입하고도 해협 봉쇄를 해제하지 못했고, 외곽에서 이란 선박을 틀어막는 역봉쇄 전략도 이란 물동량의 10%도 차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봉쇄와 역봉쇄의 장기화 속에서 피해가 누적된 쪽은 이란이 아니라 미국과 세계 경제였다. 트럼프에게 협상 타결은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강요된 귀결이었다.

 

14개 조항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제4조다. "최종 합의 후 30일 안에 자국 군대를 이란 이슬람 공화국 인근에서 철수할 것을 약속한다"는 문구는 걸프 지역 주둔 미군의 전면 철수로 해석될 여지를 안고 있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란 측은 이를 중동에서의 미군 전면 철수인 양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에 대해 백악관은 제4조의 미군 철수란 걸프 상시 주둔 병력의 전면 철수가 아니라, 2026년 2월 28일 전쟁 발발 이후 한시적으로 증강 배치한 대규모 추가 전력, 즉 해상 봉쇄 부대, 추가 항모전단, 방공 부대 등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원상 복귀시키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중동의 영구 주둔 기지를 폐쇄하거나 병력 전체를 본토로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해명이다.

 

그러나 양해각서의 문구가 철수 지역을 UAE·카타르 등 특정 국가로 명시하지 않고 '이란 인근'이라는 모호한 표현에 그침으로써 혼란을 자초했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이 초기 발표에서 미군 철수를 시사했다가 곧바로 "걸프 지역에 당분간(for a while) 머물 것"이라며 말을 바꾸는 등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임으로써 걸프 동맹국들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백악관의 전면 철수 부인에도 불구하고 걸프 국가들의 안보 불안은 가라앉지 않는다. 이후 60일 협상에서 '전쟁 증강 전력'과 '기존 주둔 전력'의 경계가 어떻게 확정될지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전쟁 기간 이란을 압박하던 미 해군의 강력한 해상 봉쇄 전력이 걸프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호르무즈 해협의 실질적 통제권이 다시 이란 혁명수비대(IRGC)의 손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자국 바로 앞바다를 장악하던 미군 압박 전력의 공백은 걸프 국가들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전략적 리스크다.

 

이번 전쟁에서 걸프 국가들이 입은 상처는 깊다. 이란의 미사일·드론 공습이 자국 내 미군 기지는 물론 석유 인프라까지 직접 타격했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허브로 불리던 UAE에는 이스라엘에 발사된 것보다 많은 미사일과 드론이 쏟아졌다. 역설적이게도, 미군 기지를 유치해 안보를 확보하려 했던 선택이 오히려 이란의 최우선 타격 목표가 되는 빌미가 됐다. 

 

이 냉혹한 현실 앞에서 걸프 국가들이 안보를 미국에 전적으의존하는 기존의 안보체제를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UAE·바레인은 이미 이란과의 외교 접촉을 급격히 늘리고 있다. 카타르와 UAE는 미국-이란 휴전 합의 이전에 고위 관료를 이란에 파견해 관계 개선 방안을 직접 논의했다. 이란 역시 이들 친미 국가들과 실용적인 소통 채널을 가동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도 주목된다. 파키스탄을 통해 협상 진행을 사실상 실시간으로 모니터한 중국은 걸프 국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란과 걸프 국가들의 관계 개선을 기반으로 중동에 새로운 역내 안보 질서를 구축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적 측면에서 이란이 거둔 실익은 놀랍다. 양해각서에는 미국이 3,000억 달러 규모의 이란 재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란의 현재 GDP가 약 3,700억 달러임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이란 경제 규모에 맞먹는 수준이다. 여기에 원유 수출 제재가 해제될 경우 이란은 연간 약 700억 달러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동결된 해외자산 약 1,000억 달러의 해제까지 포함하면, 최종 합의 시 이란이 손에 쥐게 될 자원의 규모는 중동의 세력 균형 자체를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이번 합의가 최종 타결로 이어진다면, 이란은 중동 최강국을 넘어 글로벌 차원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세계 에너지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쥐고 있는 이란은, 지정학적 영향력에서 미국·중국·러시아에 이어 세계 4위권의 강국으로 떠오를 잠재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번 합의가 진정한 최종 타결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두 장애물이 협상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직접적인 변수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이번 합의에 서명하지 않았고, 점령 중인 레바논 남부에서 철군할 의사도 없다. 이스라엘이 이 합의를 무력화하려 한다면, 레바논에서의 군사 행동을 언제든 재개할 수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어느 수준까지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느냐가 이번 휴전의 운명을 결정짓는 관건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하는 변수는 트럼프 자신이다. 그는 이란과의 협상 과정에서 두 차례나 기습 공격을 감행해 신뢰를 짓밟은 전력이 있다. 이번에 이란에 이례적으로 대폭 양보한 것이, 합의를 지킬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중간선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시간벌기용 카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간선거 이후 이 합의를 백지화하는 수순이 뒤따를 수도 있다.

 

이란도 이 점을 잘 안다. 이란은 트럼프를 신뢰하지 않는다. 60일 협상에 임하면서도, 전면전 재개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를 결코 늦추지 않을 것이다. 이란의 핵 억지력 강화와 군사적 준비 태세 유지는 이란으로서는 상수에 해당한다.

 

결국 이번 미국-이란 휴전 합의의 본질은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중동질서 재편의 시작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군사적으로 이란을 굴복시키지 못한 미국, 경제 재건의 숨통을 틔운 이란, 안보 후견인을 잃어가는 걸프 국가들, 그리고 이 공백을 새로운 질서 구축의 기회로 삼으려는 중국,  이 네 축이 각축하는 구도속에서 중동지역은 합의와 파국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게될 것이다. 이 위태로운 균형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지는 60일의 추후 협상 과정에서 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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