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의 3•1운동, 3•1혁명, 3•1절이 아니다. 지금의 3•1, 지구공유지 모두의 해방이요, 광복인 3•1이 필요하다. 도광양회(韜光養晦) 문명의 어둠인 차별, 불평등, 폭력 속에서 빛을 길러 새날을 연다. 자본과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여 무엇으로 이루고 무엇으로 독립하겠는가
국가 자체가 횡포한 개인이다. 국가의 발생 자체가 인류 문명 퇴보의 산물이다. 수천 수만 년 동안 평화롭게 살던 아메리카원주민을 천연두 묻은 담요로 95%를 학살하고 미합중국이라는 국가를 세운 것이 진보이고 진화인가
태양과 바람과 바다가 어찌 국가의 것이고 에너지 재벌의 것인가
‘신상태(New Normal)’, ‘새판짜기(New Deal)’라고들 한다. 그런가 코로나19가 가져온 신천지는 자본의 것이다. 자본의 신상태요, 자본의 새판짜기이다. 공유지를 없애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은 자본주의 초창기의 신상태, 새판짜기인 인클로저(enclosure)의 재림이다. 디지털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새판도 신상태도 아니다. 1599년 9월 24일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가 주식이라는 종이조각으로 발행한 신상태의 연장이다. 하여 ‘신상태’, ‘새판짜기’라고 부르는 것들은 구상태요, 헌판짜기의 연장이다. 푸코식으로 말하면 부드러운 관념의 쇠사슬로 자본 제국의 영원한 기초를 놓는다. ‘파시즘’이 어찌 몽둥이만이겠는가 몽둥이보다는 말랑말랑한 혀가 훨씬 좋은 법이다. ‘뉴딜’이라고 ‘신상태’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이 자본의 파시스트인 것을 모른다. 알고서 하는 이들도 못 되었지만 모르는 이가 아는 흉내를 내는 것은 무능을 넘어 죄악이다. 선한 이가 몰라서 죄를 짓는다. 그가 선하니 그 죄악을 용서할 수가 있는가
누대로 어민들의 바다, 자치 관리하던 공유지 바다를 국가의 폭력으로 개발하는 것이 뉴딜인가 바다의 자치와 바다의 민주주의를 빼앗아 신재생 에너지 재벌, 20세기 석유왕 록펠러를 태양의 왕으로 부활시킨 바다의 태양광 발전단지를 그린 뉴딜이요. 신상태라고 한다. 태양과 바람과 바다가 어찌 국가의 것이고 에너지 재벌의 것인가 새만금 바다와 신안 바다가 국가와 재벌의 것인가 서울이 전기를 제일 많이 쓰니 한강변에 만들지 왜 전라도 바다에 만드는가 대한민국 3491개의 읍면동에 마을 주민이 주인인 마을발전소를 만들어 에너지 주민 주권을 실현하는 것이 ‘신상태’요, ‘그린뉴딜’이요, 일자리요, 민주주의이다. 몰라서 무능한 것이다. 자신이 자본의 꼭두각시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선무당이 더 무서운 법이다. 역사는 완성이 없다. 서양의 창세기 신처럼 '보기 좋더라' 할 수 없다. 보기 좋았는데 사람이 죄를 지어 세상이 나빠졌는가 그 원죄를 안고 회개하여야 하는가 우주도 역사도 무한히 생성하고 창발한다. 모두가 과정에 있다. 그러니 완성의 공이 없다. 어찌 역사의 최종 국면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 최종 국면을 향해 사회는 진보•진화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진보, 진화는 우승열패, 약육강식, 문명과 야만, 고등과 하등의 갈라치기와 지배를 낳았을 뿐이다. 진보와 진화를 경멸하는 까닭이다. 보수와 진보가 대립항이 아니다. 보수적 진보요, 급진적 진보이다. 보수와 급진이 대립항이다. 진보의 대립항은 퇴보 또는 반동이다. 진보도 퇴보도 못마땅하다. 그저 스스로 다스리는 자치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다. 사람인들 하늘인들 세상이 열리고 왜 일을 안 했겠는가 일을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일은 이루다에서 왔다. 일을 했다면, 이루었다면 어찌 세상에 차별, 억압, 지배, 수탈, 파괴가 있는가 그러니 역사가 어찌 마쳐지겠는가 역사가 마쳐졌으니 그저 앞으로 갈 뿐이라는 말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늘 있었다. 그들은 천세, 만세를 불렀다. 천세, 만세를 부르는 이들은 지배 세력이었다. 동학의 하늘은 기독교의 하늘처럼 보기 좋았는데 사람이 죄를 지어 세상이 나빠졌다고 사람의 원죄를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당신의 잘못이라고 고백한다. 동학의 하늘은 심판하지도 벌을 주지도 않는다. 천당, 천국으로 현실의 비참을 내일의 유토피아로 혹세무민하지도 않는다. 오늘 불행한데 내일의 천당이 무슨 쓸모인가 그러니 수운을 만난 하늘이 말하기를 개벽 이래 5만 년 동안 차별과 억압이 있어 공이 없더니 너(수운)를 만나니 성공하겠구나! 한다. 하늘이 한낱 사람을 만나 성공하겠구나 한다. 그 너가 어찌 수운뿐이겠는가.
애썼으나 공이 없다. (노이무공勞而無功) 내 마음이 네 마음이구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이 무슨 말인가 하늘이 공이 없다고 투덜대지를 않나. 사람을 만나니 네가 공을 이루겠구나 하지를 않나. 이런 어리삥삥한 하늘을 어찌 믿겠는가 그래서 동학은 믿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인가 내가 하늘을 믿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늘이니 내가 하늘 일을 하는 것이구나. 믿지 말라는 게 아니다. 믿기만 하고 하늘 일을 하지 않으면 쓸모없다는 말이다. 노이무공한 ‘하늘’, 사람을 만나 공을 이루겠구나 하는 하늘! 하늘인 내가 힘이 모자라니(?) 사람인 너희도 스스로 하늘이 되어 세상을 바로 잡으라는 인간혁명 선언이다. 하늘을 만인만물에 확장하는 창발과 생성의 주체 선언이다. 하늘인 나만 우주를 역사를 세상을 만들겠느냐. 너희도 내 마음처럼 주체적으로 자각한 ‘신인간新人間’이 되고 ‘신물新物’이 되어 역사를 다시 생성하고 만들어라. 5만 년을 지내보니 세상이 너무 못쓰겠구나. 다시 열어야 한다. 지금까지 ‘개벽시대’라면 앞으로는 ‘다시개벽’ 시대이다. 이 하늘은 혁명하라는 마르크스나 신은 죽었다(근대는 죽었다.)고 외치는 전복의 철학자 니이체를 가볍게 웃는다. 통으로 세상의 축을 바꾸는 ‘다시개벽’을 하라고 한다. 혁명 품은 ‘다시개벽’이다. 참으로 급진적인 하늘이다. 하여 동학은 지금까지 역사 시대의 세습 혈통왕의 머리를 미련없이 잘랐다. 천명의 소유자라는 왕의 머리를 자르고 천명의 소유를 만인만물에 확장했다. 천명이 무엇인가 ‘정명’하는 일이다. 정명이 무엇인가 대의명분이다. 대의명분을 신분제에 고정한 유학을 뛰어넘었다. 일하는 하늘을 외쳤던 묵가를 호출했다. 고루, 두루,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을 불렀다. 세상을 바꾸려는 내 마음(하늘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 너희는 세상을 바꾸라.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 구분이 아닌 고유명사가 된 근대 또한 세습 혈통 왕의 머리를 잘랐다. 그런데 근대 이성은 세습 혈통 왕의 자리에 자본왕과 국민국가왕(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을 세웠다. 근대 이성은 결단코 왕의 머리를 자르지 못했다. 대의제는 대의제이지 대의제를 어찌 민주주의라고 부르는가 근대 이성의 가장 큰 사기이다. 대의자들끼리의 공화이지 어찌 국민공화정인가 근대 이성은 귀족의 자리를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당 전위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만인만물이 창발자•생성자로서 창발 생성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라는 동학의 ‘다시개벽’ 선언은 근대이성과는 전혀 다른 사유이다. 동학은 조선의 자주적 근대, 토착적 근대가 아니다. 조선식 근대이성은 더 더구나 아니다. 서구의 국민국가공화정(사실은 대의 과두정일 뿐인)도 아니다. 그럼으로 1894년 동학혁명 때의 ‘다시개벽’인들에게 근대공화정 사고가 없다고 하는 말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근대이성 찬양자들이 동학혁명에 하는 그 말은 비난이지만 동학하는 필자는 칭찬으로 듣는다. 근대공화정이 사실은 부르주아지공화정인데 동학이 어찌 그런 공화정을 하겠는가. 만인만물을 하늘로 세우는 동학이 어찌 국가의 식민 국민을 두겠는가 오로지 이윤만을 무한증식하고 자연을 수탈하는 부르주아지공화정, 한 무리의 주조된 붕어빵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만들겠는가 3•1 다시개벽절은 근대공화정도 아니요, 근대 국민국가도 아니다. 시장에서 다투며 경쟁하는 근대이성도 아니다. 시장에서 권리를 얻거나 얻으려는 시민市民도 아니요. 피부, 언어, 문화, 역사로 구분하는 전통의 발명인 민족도 아니다. 3•1 ‘다시개벽절’은 모시는 ‘시민侍民’이다.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이다. 그러니 어찌 사람만의 인권이겠는가 말이 좋아 인권이지 소유권의 다른 이름이다. 돈에다 권리를 부여하는 법인도 있는데 강과 산에도 권리를 주는 지구권은 왜 없는가 인권, 지구권, 자연권 등을 다 포함하여 천권이라 한다. 근대이성 쉬운 말로 합리이다. 합리가 무엇인가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용을 추구하는 것이다. 싸게 사고 비싸게 파는 일이 합리이다. ‘다시개벽’은 자본주의의 뿌리인 합리合理가 아니라 ‘화리和理’이다. 만인만물을 모시는 ‘화리’이다. 근대공화정 대의과두제의 삼권분립이 아니다. 경천•경인•경물의 삼경자치이다. 경물이 무엇인가 고루, 두루, 널리 사람과 자연, 자연의 소산물들과 어우러지는 것이다. 경인!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어우러져 모시는 일이다. 경천! 우주자연의 이치를 화리로서 대하는 일이다. 대의과두자들끼리만의 근대공화정과는 차원이 다른 ‘삼경정’이다. ‘하늘정’이다. 삼경정의 뿌리는 자치•자급•자연이다. 통치가 아닌 스스로 다스리는 자치이다. 하여 국가가 자원을 통제하여 내려주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주민공유의 기본자산이 사회유산으로 상속되어야 한다. 태어나면 모두가 땅 한 평을 가진다. 5천만 자치민이니 5천만 평이다. 그런 땅이 있는가 있다. 새만금 땅은 총 409km² (123,939,393평 내수면 포함)이다. 이중 5천만 자치민 1인당 한 평에 해당하는 5천만평(새만금 면적의 40%)을 자치민의 공유지로 하고 여기서 나오는 소득을 5천만 자치민에게 배당하면 된다. 새만금 땅을 자본의 만리장성으로 할 게 아니라 5천만 자치민의 공유지로 해야 한다.(새만금공유지론의 세세한 구상은 따로이 밝히겠다.) 태어나면 누구나 땅 한 평을 가지는 나라가 삼경정이요 하늘정이요 모심이다. ‘3•1다시개벽절’이 말한다. 근대의 허깨비를 버리고 새 세상을 만들라. 인류세를 끝내고 문명의 축을 바꾸는 거대한 전환시대를 만들지 못하면 대멸종세(터미네이터세)가 온다. ※ 이 글은 전북포스트에도 실렸습니다. <저작권자 ⓒ 직접민주주의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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