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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도올 동학선언문은 동학의 말이 아니다- 제1회 무화(無化)

강주영(전주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 기사입력 2021/05/26 [07:46]

[기고문] 도올 동학선언문은 동학의 말이 아니다- 제1회 무화(無化)

강주영(전주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 입력 : 2021/05/26 [07:46]

  202159일 정읍에서 동학선언문을 발표한 뒤 도올의 동경대전도 책방에 나왔다. 코로나 대유행의 시기에 인류와 지구공유지 모두가 새길을 찾는 때에 발표된 글이라서 사람들의 관심이 크다.  긍정정인 반응도 있지만 우리 동학의 진면목을 과연 잘 이해하고 표현했는지 한 편에선 우려 하는 이들도 있다.   이에 직접민주주의뉴스에서는 도올의 동학선언문에 비판적 견해를 소개하기로 하였다동학하는 사람 강주영의 글을 '도올 동학선언문은 동학의 말이 아니다'는 연재 글로 몇 차례에 나눠 싣는다. 이 글은 직접민주주의뉴스와는 무관한 개인의 글임을 밝혀 둔다.

 

 ♦ 도올 동학선언문은 동학의 말이 아니다 - 1회 무화(無化)

도올 선생(이하 편의상 도올)의 동학선언문을 몇 번이고 읽었지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학선언문이라 할려면 동학의 말로 써져야지...  도올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철학을 어지간히 공부한 사람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아 보였지요.

더구나 이제사 겨우 동학을 할려는 저 같은 이에게는 정말 어려웠어요. 몇 번을 읽어도 알쏭달쏭이었지요. 그냥 읽으면 다 좋은 말씀인데, 그것이 동학인지, 동학이 아닌 다른 것인지 물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함께 생각해 보자고 이 글을 씁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태허太虛의 무한한 포용에 자기를 던지는 순간 사랑은 달성됩니다.”

도올의 이 글마디에서부터 막혔습니다. ‘무화無化가 노자의 말인지 서양철학자 하이데거의 무화인지  누구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박사 논문을 쓸거면 몰라도 그것을 따질 까닭은 없겠지요.

무화가 흔히 하는 말로 나를 버리고 모두를 위한다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인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를 없애고 모두를 위할 수 있습니까  벗들과 이야기 하다가 니 욕심 좀 버려 멸사봉공하자고.”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말이지요. 하지만 애국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라 할 때의 멸사봉공이라 하면 달라집니다. 멸사봉공은 독재자들도 흔히 쓴 말이고, 지금 여야 진보, 보수도 흔히 쓰지요.

그래서 굳이 나를 없애는 멸사봉공을 바로잡아 동학의 말로 쓸려면 해월 최시형이 말씀하신 향아설위(向我設位)가 알맞다고 생각해요. 이는 우리말 하늘이 아닌 사람이 어쩌지 못하고 그저 좇아야만 하는 천(Tian)을 서로 맞대거리 하고 품으며 살리는 하늘로 뒤집은 것이죠.

 

우리말 하늘은 중국말 천Tian으로 번역할 수 없어요. 동학의 글에서 천은 단지 표기를 빌렸을 뿐이지요. 하늘과 중국사상의 천Tian은 같은 게 아니고 도리어 서로 등져 있어요. 당시 말로 하면 성리학의 권력을 통으로 뒤집는 어마어마한 말이지요. 향아설위를 지금 말로 하면 고장난 근대문명을 개벽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국익이니 뭐니 하면서 멸사봉공, 무화하라고 하는 것은 다 나를 업신겨기는 생각이 아닐까요. 나를 살리고 살려서 모든 우리를 조화정(조화누리)으로 가자는 것이 동학으로 알거든요.

도올이 말한 무화는 동학에는 없어요. 동학은 도리어 나를 살리고 하죠. 그것의 우리말은 살림입니다. 살림을 잘 한다는 말은 재산을 잘 늘린다거나, ‘알뜰하다로 요새는 쓰이지만 본디는 까지 넣은 모든 우리와 것들을 서로 살리는 아주 깊고도 넓고 큰 말이거든요. 그래서 잘 살아 보세.’는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앉고 이런 게 아니라 (다음 세상에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지상천국을 만들자는 말인 것이지요.

 

 

그런데 무엇으로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궁금해져요. 여기서 홍익인간 말씀을 드려 볼께요. 온 누리의 모든 사람과 것들을 돕자는 홍익(弘益)의 마음으로 말할 때는 먼저 홍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저는 단군 할배의 홍익인간’(弘益人間)널리 사람 세상을 돕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막연히 돕자가 아니라 온 누리의 사람과 모든 것에 홍익을 하는 사람, 즉 주체적 깨우침의 사람이 되라는 말로 생각합니다.

그게 그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게 그것이 아니지 않을까요  홍익하는 사람이 될려면 먼저 재세이화’(在世理化)를 해야 합니다. 밝은 이치가 세상에 돌도록 해야 하거든요. 그럴려면 어찌해야 하나요  ‘성통광명(性通光明)’해야 합니다.

재세이화’ ‘홍익인간까지는 많이 들은 말인데 성통광명은 뜬금없는 말이지요. ‘성통광명은 사람은 본디 하늘의 밝음을 깨우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밝음을 깨우쳐야 온 누리에 하늘이 가득하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요.

그 하늘이 나에게 깃들었는데(내유신령內有神靈) 하늘을 깨치고 모셔서 온 누리를 살리려 나서는 일을 말하는 외유기화(外遊氣化)’ 즉 홍익할려고 우리 할배들이 1894년에 혁명 품은 동학개벽에 나선 것이지요. 무화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도올은 무화無化자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 하였는데 좋게 보면 그것은 불가의 해탈 같기도 하고, 보다 근본적인 진리에 이르려는 자기 부정의 태도 같기도 해요. 그러나 고통받는 현실의 세상에서 무화라는 형이상학적 태도는 한가합니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를 고통에서 살리자고 하는 말이 더 다가오는 말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동학에 무화는 없으며 조화(造化)’가 있고, 모심으로서 나를 살리며 모두를 살리는 동귀일체(同歸一體)’가 있습니다. 무화로서 하늘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리는 조화로서 하늘 마음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 수운 선생이 말한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라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지요. 동학은 개인을 함부로 하지 않아요. 개인지상주의는 멀리해야지만 개인은 귀한 하늘이거든요.

2회에서는 태허太虛의 무한한 포용이 동학의 말인지 아닌지 묻고 따지고 풀어 볼랍니다.

* 이 글은 전북포스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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