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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인께❗ 동학東學은_동학動學이다.

강주영(전주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 기사입력 2022/02/26 [16:07]

동학•천도교인께❗ 동학東學은_동학動學이다.

강주영(전주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 입력 : 2022/02/26 [16:07]


대나무를_키우는_사람들

 

"고해의 파도 속에서 해녀가 부르짖는 가장 소중한 소리, 지옥의 갱 속에서 광부가 부르짖는 가장 으뜸되는 소리는 '살려'. 뜻 모르고 중얼거리는 기도는 혀의 부질없는 무용이며, 뜻 모르고 중얼거린 주문은 입술의 부질없는 풀무질이다."(1974, 34세의 윤노빈 <신생철학>, 학민사)

5년마다 서로 적대하는 이름을 외치며 당선의 기도와 주문이 우글우글하는 그 입술의 숭배는 황금송아지다. 한 순간의 혁명, 개벽은 없다. 하지만 개혁, 개량이라도 길은 맞아야 한다.

생명이 가는 길이 똥구멍을 막은 새만금의 콘크리트숲, G5, 코스피5000, 5만달러는 아니다는 말이다. 좁은 대의 제도 정치는 그렇더라도 생명의 정치인 철학의 임무는 적대하는 한 표의 이름이 아니라, 한해륙(한반도가 아니다.)을 생명의 터전으로 만드는 설계도여야 한다.

인내천人乃天은 인내천人乃賤의 고해에서 건진 파국의 해방이다. 은 사람만이 아닌 생/명이다. 해월은 "털벌레 삼천도 한울이다"고 하였다.

인내천의 파국으로 "살려"를 수장(세월호)하고 콘크리트 더미로 묻는 것(광주붕괴)은 생명이 노동자이고 노동의 재료라는 5천 년된 생각이다. 노동자, 일자리...지겹지 않은가  노동은 고통스럽지 신성하지 않다. "노동이 신성하다."는 것은 5천 년 파시즘이다.

아니 생명은 사는 것이지 노동자고 일자리를 찾아 헤메는 부나방이란 말인가  일은 이루는 것이지 노동이란 것인가  생명을 이루는 일은 놀이지 노동이 아니다.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따로 노동과 이루는 일과 놀이에 대해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타도의 계급의식 전에, 시장에서 다투는 시민의식 전에 생명감이, 이성 전에 감응(정동情動 affect)이 있다. 온갖 마귀의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들뢰즈) 시장의 시민市民을 파국하고 모시는 시민侍民이 되어 반생명을 타격한다.

인간계 : 동물계, 천상계 : 지상계, 유기계 : 무기계, 도시 : 농촌, 부자 : 빈자, 권력 : 비권력, : , : , : , 생명 : #활물 등 분리하여 갈라서 다투고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다. 세계가 아니면 무엇인가 

 

다시 정명이다. 세계가 아니고 모든 목숨과 것들이 천에서 천으로 해방된 "한울"이다. 계가 아니고 망(network)이다. 의 우리말이 그물이고 ''이다. 그물의 으뜸 줄기가 우리말 '벼리'.

사진 - 뉴스원
사진 - 뉴스원

 

이분법이 아니라 다중성의 울이다. 남의 밖에, 남과 여 사이에, 여의 밖에 무궁한 울이다. 도시하면 이렇다. ••••• . 다중우주다. 사이와 그 밖이다. 여와 야, 좌와 우, 정과 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도시와 농촌이 아니다. 동과 서의 반전이 아니다. 어디가 동이고 어디가 서인가?

 

동과 서의 구분이야말로 지금도 서세동점하려는 이들의 '제국의 형이상학"이다. 이병한의 반전反轉을 서에서 동으로가 아니라 다전多轉으로 키워 읽는 까닭이다. 음과 양의 둘을 64....다궤로 다중망화한 주역의 슬기다. 하여 2022년 신주역을 찾는 까닭이다. 활물과 생명의 주역, 활물과 생명의 동학動學을 찾는다.

활물로 돌아간다. 활물活物(AI, 인공지능)은 이병한의 표현이다. 놀라운 정명이다. 혜강 최한기는 '일단활물一團活物'이라 하였다. 그렇더라도 컴퓨터 기계들을 생명으로 포접包接'활물'은 놀라운 감응력이다. 활물이기에 이 활물들에게도, 강물에도 나무에게도 생명권이, 근로기준법이 주어져야 한다. 어찌 사람만의 인권이란 말인가  하여 생명운동의 최전위는 길냥이들을 돌보는 길냥이맘들이다. 비록 그것이 못된 사람에게서 도피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포접이 무엇인가  동학의 말이다. 그보다 먼저 바람(희망)과 바라는 기도와 주문과 해방의 흐름으로서 풍류도 최치원의 삼교포함접화군생 三敎包含接化群生의 그 포접이다. 담을 포이을 접이다. 담고 이은 포접은 인내천을 인내천으로 해방시키는 생명의 원리이다. 포접은 자기통치력, 자기생성력, 자기순환력을 갖는 '살려'의 동학動學이다.

'살려'의 동학動學은 죽임을 파국 즉 무위無爲하고 '살려' 으로 해방하는 이화而化. 무위이화가 한울이다. 낡은 것에서도 생명의 기운을 포접하고(기화氣化), 새 상태로 가는 것이 무위이화고 그 논리학이 불연기연不然其然이다.

해동조선에서 낳았으니 동학東學일 뿐 동학은 무위이화, 조화정(생성)의 지구, 생명들의 동학動學이다.

누가 무위이화를 '스스로 그러하다'는 요설로 만드는가  누가 얽힘의 우리인 ''을 울타리라 하는가  누가 동학을 생명들과 갈라진 옥경대의 도사, 신선들의 말로 만드는가  옥경대의 천, 하늘님, 하느님을, 형이상학의 하늘님을 무위하고 '살려', 생성의 현실동학으로 이화한 것이 한울님이다.

동학은 생명살려의 동학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무위하고 이화할 것인가 

 

생명을 가둔 문명의 마스크를 어찌 벗겨내, 캄캄한 밤의 반딧불이처럼, 약동하는 보리밭에서 뛰노는 생명의 연인으로 만들 것인가 

도시는 되는데 산촌, 농촌, 어촌이 아닌 숲시, 들시, 파시는 왜 안 되는가  도시는 일자리를 찾아 헤메는 노동노마드의 거대한 수용소다. 지역의 다른 이름은 숲시, 들시, 파시다. 생명을 담고 잇는 포접체다. 도시화의 망령이 아니라 파시, 들시, 숲시의 포접이 지역소멸을 지역약동으로 전환한다.

목재액화기술 하나면 삼성반도체 공장과 결코 바꾸지 않는다. 20층도 넘는 건물을 목재 70%로 지은 실적이 오스트리아에 있다. 그 기술로 3기신도시 아니 4, 5기 신도시를 90%#숲시로 만들 수 있다. 액상목재가 아스팔트를 벗겨내고 나무포장도로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숲시는 경제(?이 말이 못마땅하지만)약동의 신천지가 된다.

베어도 베어도 자라는 속성수 대나무가 개벽의 열쇠가 된다. 이것이 석유화학경제를 밀어내는 자연화학경제다. 202261일 지방선거는 대나무를 키우는 단체장을 뽑아야겠다. 그것이 양천이고 체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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