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민주시민들이 앞장서 촛불혁명을 이룬 대한민국에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불통의 정부가 들어선 것'을 개탄했습니다. "윤 정부의 독단적인 통제에 대응하기 위한 초비상 시민저항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진단한 필자는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적대자들 간의 진정성 있는 대화가 없이 막무가내식 불협화음과 불통 현상이 심해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비상시국'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문제의 해법으로 '먼저 의사소통의 불통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필자는 이를 위해 1, 고질적인 '불통'에서 경청하는 집단지성으로 2, 공익을 확장하는 경청능력과 소통문화 3, 인본주의적 지도자 자격 4, 영성적인 지도력과 소통능력 5, 경청하는 민주복지사회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에 3회에 걸쳐 글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갈등이 심각해진 요즘 한자리에 모인 친척이나 동창, 친구를 만나서 정말 편한 마음으로 행복한 대화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불행히도 요즘 정신건강이 좋고 ‘공정과 상식’을 일상에서 성실히 실천해 온 사람일수록 세계관이 전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울화가 치미는 걸 많이 느끼는 것 같다. 만약 ‘친한 사이일수록 종교나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일반적인 충고를 각종 만남의 자리에서 잘 따른 경우라면,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씁쓸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와 같이 평정한 마음으로 건강한 대화를 나누고픈 갈증을 느끼는 일이 자연스럽지 않은 일인가 다른 의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경우라면, 상대방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목적만으로 무조건 대화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의견에 대한 개방성이나 경청하는 자세를 보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어려운 상황이 2022년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심해졌다. 최근 한국일보에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국민 10명 중 6명은 윤 정권 출범 이후로 집단갈등 수위가 정권교체 전보다 높아졌다고 느낀다. 민주시민들이 앞장서 촛불혁명을 이룬 대한민국에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불통’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독재체제에 맞서 많은 젊은이가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해 놓은 민주사회질서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검찰 세력의 노골적인 정치개입행태로 인해 극심한 불만족을 느끼는 민주시민들 사이에서 윤 정부의 독단적인 통제에 대응하기 위한 초비상 시민저항의 필요성을 말하는 분들이 점점 늘고 있다. 오죽하면 젊은 시절에 이미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개인적으로 큰 고초를 겪은 80대 ‘원로’들까지 다시 시국 비판을 하겠는가. 책임성 있는 언론 보도와 건전한 의사소통이 결핍된 가운데 기득권의 ‘밥그릇’ 싸움이 더욱 치열해진 느낌이다.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적대자들 간의 진정성 있는 대화가 없이 막무가내식 불협화음과 불통 현상이 심해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비상시국’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적 맥락에서 서로 복잡하게 뒤엉킨 한국사회의 제반 사회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의사소통의 불통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문제해결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의 꽉 막힌 현실이 매우 심각하다는 걸 먼저 인정하고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서로 다른 사람이나 그룹과의 갈등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근원적인 소통방식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말로만 되뇌는 협력이나 협치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너무도 쉽게 습관적으로 빠져드는 ‘편 가르기’ 패턴을 털고 나와야 하겠다. 일단 모두가 부분적으로 옳다는 관점을 가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코끼리 장님 만지기식’ 대화에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확한 답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지만, 개별적으로는 부분적이나마 모두 맞는 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코끼리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협력적인 퍼즐 맞추기가 가능해진다. 그러기 위해 서로의 주장을 경청하는 일은 필수요건이다. 고질적인 ‘불통’에서 경청하는 집단지성으로 우리나라에서 ‘불통’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된 후로 경청의 중요성이 사회적 차원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남의 말을 듣고, 내가 속하지 않은 다른 그룹의 의견을 좀 더 잘 이해하려는 문화적인 변화를 촉진하기 위한 조직적인 노력이 2015년에 본격화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경청대화모형’의 개발과 함께 ‘경청대화지수’도 개발됐다. 이 경청지수에 의하면, 소통이 잘되는 대화는 대략 ‘경청하기,’ ‘이해 돕는 말하기,’ ‘예의 지키기’의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필자는 이 세 가지 영역에서 과연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 통찰해 본 적이 있다. 사회복지전공자로서 경청하는 건 비교적 잘하고 있는 듯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원치 않는 충고를 주는 버릇이 아직도 조금 남아있다. 은퇴 후로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인내심 있게 들어주고 상대방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말을 잘 나누지만 그래도 의사소통기술이 탁월하다고 스스로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만큼 언어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각자의 세계관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축적된 언어 경험과 언어사용 습관이 다른 가운데 상대방이 내가 의도한 그대로 정확히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사실 무리한 일이다. <저작권자 ⓒ 직접민주주의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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