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9일 정읍에서 ‘동학선언문’을 발표한 뒤 ‘도올의 동경대전’도 책방에 나왔다. 코로나 대유행의 시기에 인류와 지구공유지 모두가 새길을 찾는 때에 발표된 글이라서 사람들의 관심이 크다. 긍정정인 반응도 있지만 우리 동학의 진면목을 과연 잘 이해하고 표현했는지 한 편에선 우려 하는 이들도 있다. 이에 ‘직접민주주의뉴스’에서는 도올의 ‘동학선언문’에 비판적 견해를 소개하기로 하였다. 동학하는 사람 강주영의 글을 '도올 동학선언문은 동학의 말이 아니다'는 연재 글로 몇 차례에 나눠 싣는다. 이 글은 ‘직접민주주의뉴스’와는 무관한 개인의 글임을 밝혀 둔다 도올은 동학선언문 5쪽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태허(太虛)의 무한한 포용에 자기를 던지는 순간 사랑은 달성됩니다.” "Love is realized when we launch ourselves into the infinite tolerance of the “Great Emptiness,” liberating us from all compulsions of the Self." 여기서 '무화'가 동학의 생각이 아님은 제1회 '무화'에서 밝혔습니다. 오늘은 태허(太虛)가 동학의 생각이 아님을 밝혀 봅니다.
태허가 무엇일까요 '태허'를 아무런 욕심도 집착도 없는 자연(自然)상태로 볼 수도 있겠죠. 여기서 자연이라 함은 어떤 마음도 끼어들지 않는 순수 상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동학에서는 모든 사람 모든 것에는 하늘이 깃들어서 움직이기에 순수한 자연상태는 없습니다. 순수한 자연상태라는 뜻에서 태허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태허는 주자학에서는 기가 가득한 상태로서 아직 사람의 온갖 마음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동학에서는 성리학의 태허도 없습니다.
장자에게서 태허는 천지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무형(無形)의 도(道)의 뜻으로 사용된다고들 합니다. 노자의 도(道)는 무(無)에서 나오며, 도는 만물의 근원이자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에게 도는 태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다만 늘 다시 생겨나되 결이 (차원)이 다르게 나타나는 다시개벽이 있습니다. 태허가 만물을 낳았다고들 하는데, 동학에서는 하늘이 만물을 낳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늘은 만물과 함께 움직입니다. 동학은 시작이 끝이요. 끝이 시작입니다. 무한한 순환, 끝 없는 이어짐입니다. 순환은 단순히 돌고 도는 반복이 아니라 만물이 생겨나는 이치가 잘 흐른다는 뜻입니다. 즉 개벽의 다시개벽, 개벽의 이어짐입니다.
개벽이 신비적이고 주술 같지만 생명현상, 에너지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무 책상이 낡으면 썩거나 불에 탑니다. 하지만 나무가 가지고 있던 숨(한국말 '숨막히다' '기막히다' 기(氣), 외래어 에너지)의 일부는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는데 쓰입니다. 일부는 비와 함께 흘러 바다로 가서 바다를 이룹니다. 일부는 무엇인가 되지 않고 흩어진 숨(기,에너지)이 되어 돌아다닙니다. 이것을 어지러운 숨 = 무질서한 에너지 =혼돈한 기운이라고 하는데 물리학에서는 '엔트로피'라고 합니다. 동학에서 말하는 혼원일기(渾元一氣) 는 질서를 가진 기연한 숨(기,에너지)과 혼돈한 불연한 엔트로피를 모두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앤트로피와 열린계, 닫힌계, 고립계에서 작용은 길어져 생략합니다.)
앤트로피를 말한 것은 태허조차도 어디서인가에서 순환해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주 이전의 우주가 있으며, 우주 이후의 우주도 있습니다. 빅뱅이론은 우주의 어떤 국면에서의 일이지 지금우주 이전의 일은 아닙니다. 만일 박뱅이 모든 우주의 시작, 태허라고 한다면 아주 작은 점이 있어 지금 우주를 만든 그 에너지는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창조주 하느님 밖에는 다른 답이 없습니다. 빅뱅이론을 1927년 처음 주장한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라는 물리학자이자 신부였습니다. 빅뱅이론은 기독교의 창조설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태허는 기독교 말인 것도 같습니다. 동학에서 우주는 다시개벽의 연속으로 생명력을 가집니다. 세포가 자기 일을 다 하면 생명은 다시 세포를 만듭니다. 그래서 목숨을 잇습니다. 살고 죽음이 동시적입니다. 책상이라고 할 수 없는 즉 어떤 것으로서의 개체성과 주체성이 드러나지 않은 그렇지 않음(불연不然)과 책상이라고 할 수 있는 개체성과 주체성이 있는 그러함(기연其然)이 늘 쌍으로 있으며, 서로 쌍방향으로 되먹임을 합니다. 기연이 불연이 되고 불연이 기연이 됩니다. 그것이 개벽이며 생명현상이며 전환입니다. 개벽은 일상적이며 실제적 일입니다. 개벽의 크기가 한 사람, 마을, 나라, 지구, 우주로 다를 뿐입니다. 수운 동경대전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은 도올의 주장처럼 앎과 모름이 아니라 우주생성관이자 개벽관이자 순환관입니다. 동학에 태허는 없습니다. 나무 만지는 목수로 먹고 사는 필자에게 '태허'는 뜬구름 잡는 말입니다. 기존 유불선의 생각이 일하는 민중하늘님들에게는 가당치도 않기에 청년 수운이 여기저기 헤메며(주유팔로周遊八路), 열병을 앓고 한 것이죠. 수운 생각의 시작은 아주 철저하게도 사람뿐 아니라 뭇생령들의 우주적 현실이었습니다. '태허'같은 뜬구름이 아닙니다.
수운의 이 절절한 현실감을 드러내는 말이 '노이무공'(勞而無功)입니다. 5만 년 동안 하늘님이 만물에 깃들어 아주 열심히 일했는데 아무런 공이 없구나. 그런데 수운 너를 만나니 너도 좋고 나도 좋다고 합니다. 하늘님이 일하는 민중들의 처참한 현실에 한탄한 것입니다. 그것은 종래의 지배 이념이자 사상인 유불선, 서학(필자 개인 생각으로는 예수의 아버지가 아닌 교회화 권력화된 기독교)과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죠. 이제껏 노이무공하였으나 이제는 다시개벽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다투는 마음이 아닌 하늘마음(큰 하나 되는 한울 마음), 사람인 너희들이 내(하늘) 마음처럼 깨달어 주체적으로 나서 조화누리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런 하늘마음을 가지는 주문수련이 그래서 동학에서는 중요합니다. 수심정기(守心正氣) 즉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을 살리는 하늘님과 감응하는 하늘 마음보가 되도록 수련할진데 더불어 포덕(布德, 동학의 전도, 선교가 아니라, 모두가 하늘이 되도록 행하라는 뜻)하며 보국안민(輔國安民)하라는 것이다.
동경대전 전체 문장은 모두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형이상학이니 뭐니 할 수가 없습니다. 현실감, 사실감, 서양말로 하면 리얼리티(reality)가 절절합니다. 태허니 도법자연이니(다음 차례에서 노자의 도법자연과 수운의 무위이화가 어떻게 다른지 묻고 따지고 풀어 보겠습니다. ) 하는 것들은 목숨을 살리는 밥도 아니요, 농사하는 땅도 아니요, 억압받는 천민해방도 아닙니다. 도올이 '태허의 무한한 포용에 자기를 던지는 순간'이라고 쓰지 않고 "밥(땅에, 사람에게, 노동에게)의 무한한 포용에 자기를 던지는 순간"이라고 썼다면 노동자, 농민으로서의 사람들에게 엄청 박수를 받았을 텐데요.
1894년 동학하는 할배들은 뜬구름 잡는, '태허의 무한한 포용'같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몸을 던진 게 아닙니다. 동학 할배들이 몸을 던진 곳은 밥이요, 조화세상이요, 천민해방인 것입니다. 수운의 문장들은 절절한 리얼리티를 가졌는데 도올의 동학선언문은 동학의 말이 아닌 형이상학의 말만 가득 느껴집니다. 민중화되지 못한 지식인의 애민(愛民)이라고 해두겠습니다. 도올은 동학 전쟁에 나간 남편, 아버지, 연인,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려고 '청수' 한그릇 놓고 심고한 할매들의 애타는 마음을 알까 알면 그런 문장을 쓸 수가 없습니다. 도올은 현실학이자 영원한 생성과 개벽의 하늘인 동학을 형이상학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도올의 동학선언문은 형이상학의 개념들로 가득하고 문학적 수사로 반짝이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의 최고는 '고맙습니다'입니다. 도올의 글은 고맙지 않습니다. <저작권자 ⓒ 직접민주주의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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