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9일 정읍에서 ‘동학선언문’을 발표한 뒤 ‘도올의 동경대전’도 책방에 나왔다. 코로나 대유행의 시기에 인류와 지구공유지 모두가 새길을 찾는 때에 발표된 글이라서 사람들의 관심이 크다. 긍정정인 반응도 있지만 우리 동학의 진면목을 과연 잘 이해하고 표현했는지 한 편에선 우려 하는 이들도 있다. 이에 ‘직접민주주의뉴스’에서는 도올의 ‘동학선언문’에 비판적 견해를 소개하기로 하였다. 동학하는 사람 강주영의 글을 '도올 동학선언문은 동학의 말이 아니다'는 연재 글로 몇 차례에 나눠 싣는다. 이 글은 ‘직접민주주의뉴스’와는 무관한 개인의 글임을 밝혀 둔다
1,2회에서 도올의 무화와 태허가 동학의 말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3회에서는 <동학선언문> 8쪽의 글을 풀어 보겠습니다. "유구한 유·불·선의 전통이 융합된 토양(1) 위에서 합리적 정신(2)을 우주의 신비(3)와 결합시킨 신유학의 심성론의 원칙들을 철저히 고수(4)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해탈하는 자유자재로운 정신의 열정이었습니다. " ( )번호는 필자
(1) 동학은 '유불선의 전통이 융합된 토양'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불선의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한 강력한 의문과 도전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유불선으로는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니다입니다. 동학은 지식•문자적 사유의 유불선이 아니라 밑바닥 민중이 수 천 년 몸과 마음으로 이어온 하늘 사상의 새로운 창발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어머니들이 장독대에 청수를 떠 놓고 비는 것을 사상이 아니라 미신으로 취급하는 것은 문자를 아는 지식인병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주기도문 또한 체계화된 미신입니다. (2) 도올 동학선언문의 '합리적 정신'이 무엇인지는 뜻이 또렷하지 않습니다. 사전적으로 합리는 '이치에 맞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에 맞다'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 하는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어떤 이치'라는 '어떤'이 있어야만 합니다. 수 많은 서양 철학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으로는 합리는 '모두의 조화'가 아닌 '세속적 현실성'으로 들립니다. 도올은 '합리적 정신'을 영문으로는 "practical ethos"로 하였습니다. 서양철학자들이 합리를 무엇이라고 말하였던지 간에 서구 합리성이 만든 실제의 세계인 자본주의에서 합리는 싸게 사고 비싸게 파는 것입니다. 또한 합리는 사회진보•진화인데 여기에는 꼭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이 따릅니다. 합리의 꽃이라는 민주주의도 달리 말하면 지금 시대에서는 욕망의 절차적 합리성일 뿐입니다. 자본주의 시대 역사의 고유명사로서 '민주'는 폐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보편적 이상으로서의 보통 명사 '민주'는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사람인 민주뿐 아니라 '지구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새로움은 기성의 것에 대해서 불순•불온합니다. 사람들은 진보•진화나 합리를 모두의 진선미眞善美로 보통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도올이 그렇게도 애정하며 칭송하는 노자는 진선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도덕경 2장- 여러 풀이가 있겠으나 필자는 "당신에게는 아름다우나 다른 이에게는 추하며, 당신에게는 착하나 다른 이에게는 착하지 않다."라고 풀이합니다. 즉 모두에게 합리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의 사상에는 도올의 말처럼 문명 비판적 사유가 있어 훌륭합니다. 그러나 노자가 그 해결책으로 '도법자연'(道法自然) 또는 '무위'(無爲)라고 한 것은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저의 주장을 펴기 위해 노자의 진선미관을 쓴다 하여 제가 노자 지지자인 것은 아닙니다. 노자의 반진보적 문명비판적 사유에는 동의하나 그 해결책의 핵심인 '도법자연'과 '무위'를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노자가 아닙니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에는 동의하지만 그 계급투쟁이 지향하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이죠.
(3) '우주의 신비'를 도올이 어떤 뜻으로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있는 도道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이 동학의 '천도'(天道)인지 노자의 '도'(道)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동학선언문이라면 '우주의 신비'라는 추상적인 말보다는 수운의 '천도'를 풀어서 '~~한 천도'라고 썼으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도올은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과 수운의 '무위이화'(無爲而化)를 <동학선언문> 13쪽에서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따로이 글을 쓰겠습니다. 아무튼 이것은 동학•천도교의 가장 바탕이 되는 '무위이화의 도'를 노자2.0인 듯 말하는 것으로 동학•천도교인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길게 말할 수는 없지만 동학•천도교 사상가인 야뢰 이돈화는 수운의 '천도', '무위이화의 도'를 그의 저작 <신인철학>(1931)에서 "생명무궁주의", " 일대생명적 활력(一大生命的 活力)", 소아와 대아가 서로 되먹임 하며 크게 하나 된다는(일치단결이 결코 아니다.) "한울주의"라고 하였습니다. 김지하는 동학을 "생명사상"으로 말하였습니다만 그 원조는 기실 이돈화였습니다.
(4)"신유학의 심성론적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면서도" 에서 무엇을 '고수'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보통은 유학의 한 갈래인 주자학에서는 "성즉리"(性卽理)라고 합니다. 유학의 또 다른 갈래인 명대의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라고 합니다. 좋게 선의로 읽어도 전체 맥락의 글맛이 동학 맛은 아닙니다. 동학에 심학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와 종교적 사상에는 심학이 있습니다. 요가에는 '명상' 불교에는 '참선', 종교의 기도와 주문은 흔히 '마음공부'라 부르는 심학입니다. 수운 동학의 심학은 당신이 새로이 정했다는 닦을 수가 아닌 지킬 수의 "수심정기"(守心正氣) 입니다. 유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수심정기와 수기치인은 완전히 다릅니다. 동학은 성인군자가 되라 하지 않고 곧바로 네가 하늘이다고 선언합니다. 그것이 동학과 유교의 근본 차이입니다.
유교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자신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닦아 인격적 완성을 지향하는 공부로서 군자가 되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동학의 수심정기는 쉽게 말씀드리면 "나는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큰 한울= 큰 하늘), 즉 오심즉여심으로 하늘이 깃들었으니 모심으로서 하늘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동학은 다스림이 없고 모심이 있습니다. 모심에는 '누구를 위함'이 없습니다. "나는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은 그대를 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나이기에 나를 위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대가 모든 우주가 모든 하늘이 내 안에 있으니(내유신령)있으니 내 안에 깃든 모든 것들을 잘 모시라는 것입니다. 즉 민중을 위함이 없습니다. No for the people입니다. 아니 동학이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을...그럼 무엇이냐고요. 동학에는 경천, 경인, 경물의 삼경이 있습니다. 여기서 경은 하늘, 사람, 것들을 모셔 공경하고 위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사람•것들이 나를 위하니 고마워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고마워하면 위하기까지는 못 해도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이 시대에 괴롭히지만 않아도 지구는 개벽될 것입니다.
그가 그일 수 있는 것은 그 스스로 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그를 위한다면서 사실은 개입하거나 시키거나(아이를 위한다고 아이는 싫은데 억지로 학원을 보냅니다 - 청소년 우울 자살 국가 1위)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동학은 개인과 개체들의 주체성을 철저히 옹호합니다. 동학은 (하늘 입장에서 말하면) 너부터 잘 살라고 합니다. 내가 곧 하늘입니다. 내가 군자나 성인이나 목사나 스님이나 신부님을 거치지 않고 하늘님과 곧바로 맞대거리합니다. 내가 하늘님과 맞대거리한다는 것은 이돈화 식으로 말하면 일대생명적 활력(一大生命的 活力)이요, "우주의 대활정(大活精)"입니다. 그럼 나를 모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농약친 채소를 안 먹는 것은 유기농부를, 땅을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하늘인데 어찌 농약친 채소를 먹겠습니까 나 건강하라고 유기농 채소를 먹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의사가 될려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기쁨이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의 기쁨은 없이 그저 돈 잘 벌려고 피똥싸며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자기를 의료노동으로 학대하며 사는 의사들 있습니다. 그것은 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죽이는 짓입니다. 제가 환경운동단체에 후원금을 냈던 것은 지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푸른 하늘, 맑은 강, 상쾌한 숲을 누리면 기분이 좋고, 제가 건강해지고, 일을 할 수 있는 기운을 얻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사독재와 싸웠던 것은 거창한 애국심이 아니라 제가 언제든지 군사독재에 의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검찰개혁을 지지한 것은 사회정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회가 부정의하면 저와 저보다 더 아까운 제 자식들이 개피를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지 않기 위해 그를 속이지 않습니다. 제가 갑질 당하지 않기 위해 갑질하지 않고 갑질과 싸우는 것입니다. 거창한 사회정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동경대전 논학문의 시자는 내유신령하고 외유기화하니 일세지인이 각지불이의 실천적 의미는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각지불이는 여러 풀이가 있으나 모든 나들이 내 안에 깃든 하늘을 알면 (각지) 하늘을 떠날 수 없다. 즉 하늘을 지키게 된다.(불이) 다른 말로는 수심정기한다는 말입니다
동경대전 용담유사의 권학가 교훈가 도덕가에 나오는 동귀일체는 '하늘님 마음으로 모두 큰 하나(한울)가 된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같아진다가 아니라 '나'나름으로 나를 모심으로 내가 하늘이 된다는 뜻입니다. 도올의 민본이라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 아닙니다. 동학은 My, by me, for me입니다. 동학은 주체적 생령의 사상입니다. 여기서 나는 '개인', '개체'이면서도 큰 하나로서 '한울'을 모신 하늘인 나입니다. 나의 관점 너머 모든 것까지 즉 지구까지도 담는 것입니다. 지구까지 담아도 담는 이는 나요, 내 안의 하늘입니다. 지구적 전환도 결국 내가 하는 것이고 내가 기뻐야 합니다.
그러면 독재자, 사기꾼, 지구파괴자, 폭력은 왜 생길까 동경대전 논학문에서는 수운과 제자들이 길게 토론합니다. 지금도 이 글이 깁니다. 다음 기회에 살펴 보겠습니다. <저작권자 ⓒ 직접민주주의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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