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몇 번의 폭풍우가 지나간 후 나는 오랫동안 동굴 속에서 머물렀다. 용이림 시집 <그대 등 뒤의 슬픔에게> 서문의 시작 문구다. 12.3 반란의 폭풍우는 진행형이다. 핏빛 어두운 동굴에서 너와 나, 우리가 취할 선언과 행동은 바람으로 역사로 그리울 것이다.
‘그대 등 뒤의 슬픔에게’
그대, 입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어 보았다. 나에게 그대는 누구였을까? 그대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쯤 가고 있을까? 아니, 그 생각의 그대가 그 그대일까? 어김없이 시작되는 하루의 시작처럼 그대는 명쾌하지 않았다. 어쩌면 신기루처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착시는 아닐까? 다시금 나는 ‘그대’를 씹어 보았다. 명확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나는 그대가 되었다. 삶의 한복판에 나와 그대는 그렇게 인연이 되고 사랑으로 그리움으로 나란히 하고 있었다.
등, 삶이 고행이고 결국은 홀로 아리랑이라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함께이고 사회 속에 높여 있다. 함께 부대끼고 함께 가기에 위로가 되고 눈물이 되고 웃음이 된다. 그대에게 등은 뒤가 되지만 나에게 등은 앞이다. 그대에게 보이지 않는 등은 내가 어루만질 수 있으며, 나의 등은 그대가 토닥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어깨 걸고 세상의 어두운 동굴을 헤쳐 나간다. 그렇게 밝은 빛이 되었다. 어두운 동굴을 밝히는 사랑이 되었다.
뒤의, 젊은 날 소위 말하는 ‘적’들에게 잡혀가면 배후를 캐묻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없이 온화한 얼굴을 한 그들은 너무도 쉽게 폭력과 고문으로 안면을 바꿨다. 12.3 사살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가 전해지고 있다. 그대와 나의 뒤는 해맑은 웃음과 평화이어야 한다. 자유와 민주는 그런 것이다. 정의와 해방은 살아 있으므로 주어지는 숙명이다. 앞으로 살날이 뒤의 인연에 환하게 손을 흔들고 있다. 더러운 역사, 피의 역사는 끊어내야 한다.
슬픔에게, 슬픔에게는 나다. 시적 표현으로 나는 슬픔에게로 그려졌다. 나는 그대 뒤에 있다. 그대는 언제나 내 앞에 있다. 우리 사랑은 슬프다. 인생이 고행이고 삶이 슬픈 것이라면 그대와 나의 사랑도 예외일 수 없다. 슬픔은 사랑을 안고 있다. 사랑은 슬픔의 다른 표현이다. 그대가 있어 내가 아프고, 내가 있어 그대가 아프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과 슬픔에 시간을 거닐고 있다. 떠오르는 붉은 태양도 지는 붉은 노을도 함께 할 수 있어 아름답다. 슬프다.
‘# 하나’
백두대간을 뒷동산이라도 되는 양 날아다니던 그대가 있었다. 북한산, 도봉산, 검단산 등 서울 근교의 산은 번쩍번쩍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암 선고를 받았다. 뇌로 전이가 되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대가 아프고 나도 아팠다. 내 마음이 쇠하였다. 그렇게 5월 6월이 가고 나도 죽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항암 치료 경과가 좋았다. 전철을 탈 수 있었고, 걸을 수 있었다. 집에만 있을 수 없기에,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소소한 이야기라도 많이 했다. 작은 행복에도 크게 웃었다. 건강과 의지를 다지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7개월이 지난 12월에 우리는 아차산 둘레길을 걸었다. 작은 경사와 눈에도 어려워했다. 손을 잡았다. 서로 의지가 되었다. 마음이 아렸다. 14일 여의도 찬바람에 너무 무리가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의 외침은 크게 번졌다. 미치광이를 끌어내리고 단죄하는 걸음이었다. 2024년이 저물고 있다. 자꾸 따라붙는 통증은 사라지고, 2025년 더욱 활기차게 걸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동지의 손 맞잡고 우리가 함께 부대낄 일이 너무나 많다.
‘# 둘’
대학 인연으로 만났다.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다. 다섯 명이 만났는데 목사는 한 명이고, 네 명은 교회도 다니지 않는 것 같다. 셋은 장신대 졸업장도 없다. 정학, 제적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었다. 2024년 셋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을 먼저 보냈다. 동생을 먼저 보낸 친구의 아픔은 쉬이 아물기 어렵다. 술잔과 물잔이 오고 가는 속에 아픔과 슬픔을 토하고 토닥였다.
민주동문회 이야기로 이어졌다. 교회, 종교에 인연이 없는 삶에서 굳이 장신대민주동문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을 수 있다. 어쩌겠는가? 그때 그 시절에 장신대에 몸담았다는 사실이 전부다. 그 사실과 그 인연이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다는 인정이다. 12.3 비상계엄, 교회의 타락, 장신대의 개혁, 우리의 만남과 협력, 연대는 진행형이다. 자식들의 나이가 그 시절의 우리보다 많은 세월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투쟁의 길에 놓였다.
‘# 셋’
12.3 윤석열의 내란, 외환, 군사 반란은 MZ세대의 응원봉과 흥겨운 율동, 리듬 속 축제로 채워졌다. 그 속에 나는 조금은 어색하고 낯선 모습으로 맞추었다. 준비된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었다.
비밀 엄수, 보안 강화 그리고 ‘오더’에 따라 움직이고 동원되던 집회와 시위는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쉽게 접하는 sns 정보를 통해 움직였다. AI 인공지능·4차산업혁명으로 무장한 MZ는 알아서 움직이고 참여했다. 여의도의 함성은 남태령의 응원봉과 연대로 빛났다. MZ는 내 앞과 등 뒤에서 시대의 요구와 민중의 요구에 자연스럽게 부응했다. 의식화, 조직화 세대와 다른 시대의 물결이 되었다. 앳되고 어려 보이는 MZ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시대의 수레를 끌고 있다. 위선과 가식, 추한 탐욕은 너무도 투명하고 맑은 MZ로 거꾸러지고 말 것이다. 그저 그대 등 뒤에 있을 수 있어서 슬픔은 아름다움으로 행복으로 꼬리 물고 있다.
내란, 외환, 군사 반란의 잔당들은 여전히 뒤집기를 꿈꾸고 있다. 미치광이, 술주정 꾼의 ‘격노’에 말 한마디도 못 하던 한덕수 이하 국무위원, 국민의힘이 국민을 우습게 알고 있다. 권력의 기생충이던 자들이 해괴한 말장난으로 정국을 어지럽히며 반전을 꾀하고 있다. 모조리 내란, 외환, 군사 반란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
‘다시 시집으로’
인생이란 놈은 항상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귀싸대기를 갈겼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설라치면 이번엔 뒤통수를 갈기고, 쓰러져 있는 나에게 발길질을 퍼부었다. 동굴 속에서 머리 박기. 피 흘리며 쓰러져 울기. 세상의 가장 변두리 외진 곳에서 울부짖던 날의 일기이다. 이 시집은 시인도 아닌 한 화가의 시답잖은 시지만. 한때의 절망, 불안, 공황장애를 이기고. 이제는 동굴 밖으로 나와 햇빛 속을 걷는. 한 인간의 독백쯤으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그대 등 뒤의 슬픔에게』 시집의 머리글이다.
‘오지 않는 너는/얼마나 멀리 있는/외로운 꿈인지’ <오지 않는 사랑>, ‘그대와 함께 저물고 싶던/내 평생 앓는 병은/사랑 결핍증’ <난치병>, ‘내가 (너에게)/새로운 장미꽃을 줄게’ <어린왕자에게>, ‘사랑아, 이별은 거기 두고/너만 혼자 오렴’ <사랑 마중시>, ‘어찌하여 알면서/이 나이 먹도록/다른 만남을 꿈꾸는 걸까요’ <결말>, ‘그대 꽃피는 날/다시 웃으리’ <꽃피는 날>, ‘내 사랑아/아직도 거기 있었구나/별빛 가득한 하늘에’ < 별빛이 내리는 밤>, ‘진정한 사랑이란/등불 하나 가슴속에/켜 두는 것’ <원하는 사랑>, ‘사랑이란/갑자기 당하는 교통사고 같은 것’ <접촉사고>, ‘온갖 추억들이 쏟아져/내 가슴은 홍수가 나’ <구멍>, ‘너는 그곳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이따금 열차가 지나갈 때만/비명으로 뜨겁게 감전되지’ <선로>, ‘둘이서 사랑이 죽을 때까지/마시고 싶다/독약 같은 사랑주’ <감옥>, ‘이제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정말로 아무도 그립지 않다’ <거짓말>, ‘더욱 멍청한 것은/이별하고도 너를 그리워하는 것’ <굴레>, ‘나는 기억나지 않는/네 전화번호를 생각하려 애를 써’ <꿈에서>, ‘사랑이란/언제나 우연을 가장한/운명으로 다가오는 것’ <사랑이 올 때>, ‘떼어내고 또 떼어내도/다시 돋아나는 굳은살/끈질기게 되살아나는 <오래된 슬픔>.
슬픔이 어찌 하나일 수 있으랴. 아픔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렇지 않아도 비틀거리는 나에게 귀싸대기, 뒤통수, 발길질을 퍼붓는다. 용이림 시인은 절망, 불안, 공황장애의 동굴 속에서 12년의 세월을 질기게 버티어 냈다. 화가로서 화려한 날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죽을 만큼 아픈 고통 속에서 슬픔을 짊어지고 가야 했다. 세월을 이겨낸 사람은 단련된다. 도를 닦고 내공이 쌓인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대 등 뒤의 슬픔에게』 시집은 아픔과 슬픔에도 언제나 이어지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은 구속으로부터 탈피이고, 저항과 투쟁이다. 한 인간이 느끼는 사랑은 시대의 운명 속에 놓여 있다. 사랑은 인간에게 시인에게 숙명이다. 시인의 아픔과 사랑이 나에게도 느껴질 수 있음은 부딪치고 깨지며 살아온 세월의 언덕이리라. 용이림 시인의 앞날에 아름다움이 가득하길 바란다.
2025년에도 바람은 여전히 다양한 색깔로 울고 웃고 스쳐 갈 것이다. 슬픔과 난관을 이겨낼 수 있는 바람은 낮은 자의 사랑과 연대이리라. 좀 더 많은 사람이 『직접민주주의뉴스』로 북적대기를 빌어본다.
▶근조◀ 칼럼 후에 제주항공 사고가 있었습니다. 삼가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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