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볕이 부드럽다. 햇빛이야 어느 계절이나 태양에서 지구를 향해 달려온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햇빛에 대한 느낌을 다르게 한다. 2024년의 여름 햇볕은 뜨거웠고 힘들었다. 기후 위기에 따른 인간의 몸부림도 그만큼 커지고 있지만, 자본의 탐욕은 멈춤을 알지 못한다. 자본주의 권력에 기후 위기는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자본과 권력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에도 가을볕은 나의 신경을 부드럽게 하고 있다. 하늘과 산과 강이 바람에 설레고 있다.
직접민주주의 뉴스에 칼럼을 쓰기로 했다. 며칠 동안 ‘해, 말아’ 마음의 실랑이가 있었다. 나는 직접민주주의자다. 부르주아지 대의제는 가짜민주주의다. 이런 까닭에 나는 직접민주주의 뉴스에 마음이 가고 응원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는 문제는 다른 문제다. 여러 생각이 드는 중에 내가 지식이나 학문적으로 부족하다는 것과 글을 꼭 써야 할 만큼 절실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이나 학문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세상에 똑똑한 전문가, 박사, 재야의 고수가 넘치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절실하지 않다는 사정은 천성이 게으른 나의 꼴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연유는 인터넷 언론 <직접민주주의 뉴스>의 형편에 기인한다. <직접민주주의 뉴스>의 시작은 결단과 용기로 화려한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몇 년이 흐른 지금의 모습은 뉴스 기사의 원고를 찾기가 쉽지 않다. 주변의 지인들도 <직접민주주의 뉴스>라는 인터넷 언론에 아는 것이 없다. 부족한 내가 글을 쓰기로 했지만, <직접민주주의 뉴스>가 활성화되면 언제든 게으름은 나의 몫이다.
나는 초중등 시절에 충과 효, 선하고 의로운 삶에 마음이 갔다. 사춘기 방랑은 하나님으로 맞닿았고, 스무 살 신학대학의 청년학도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모순에 철학과 사상으로 인생의 정립과 결단을 내렸다. 왜 열심히 일하고 선한 삶을 사는 아버지, 어머니들이 가난과 사회적 차별에서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지, 왜 미국은 패전국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 분단의 경계선을 그어야 했는지, 분단 체제에서 민주주의자는 왜 빨갱이로 체제 전복 세력으로 고문과 폭력에 놓여야 하는지, 나는 이러한 모순을 걷어차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내 것으로 갖게 되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또한 치열한 날들을 살았다. 불평등한 계급사회와 구조적 모순에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제 예순 살이 되었다. 많이 부드러워지고 작아졌다. 그렇다고 나는 젊은 날의 결단과 용기, 정의와 평등의 싸움판에서 물러설 수 없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목숨으로 시대를 앞서간 동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문과 폭력에 얼룩진 비명, 목숨을 잃은 그들은 나에게 북극성이며, 나침판이다. 나의 삶은 동지의 피와 살, 생명으로 주어진 ‘덤’이다.
『따따부따』는 주제와 내용에 한계가 없다. 주기를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시인, 작가로서 강현만의 일상을 담고자 한다. 가는 길에 누구의 고견도 좋다. 자구를 손보는 것은 좋으나 내용을 건드리는 것은 꼭 논의를 거쳤으면 한다. <직접민주주의 뉴스>의 구성원이라면 단체카톡방 등 다섯 곳 이상에 퍼 나르기로 함께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다. <직접민주주의 뉴스> 언론이 많은 이들에게 오르내리기를 바라며, 부족한 글에 응원을 부탁드린다. <저작권자 ⓒ 직접민주주의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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